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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는 당시 무신론적 철학자들이 말하던 세계관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교황에게 항소했다. 하지만 노쇠한 그는 최후의 판결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고요히 영면에 들었다. 그가 죽고 2년이 지났을 때, 교황 요한 22세는 그의 글과 강의에서 발췌한 28개 명제를 평가해서 일부는 이단이고 일부는 위험하다고 판결했다. 사실 교회가 이런 판결을 내렸던 것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교회의 역할을 축소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했다. 중간에 교회의 권위를 매개하지 않고 신과 개인을 직접 연결하는 사상을 교회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저작물은 배포 금지되었고, 공개적 논의도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그의 저작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유죄 판결에도.. 2022. 10. 20.
기 신비 일곱 번째 장이 끝났다.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철학과 기독교를 근본 뿌리로 한다. 이 두 사상은 일반적으로 대립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이원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2천년의 역사 동안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다. 이번 장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해보았다. 첫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추상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열정적인 사도였던 바울의 사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필연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바울의 역할이 400년 전 플라톤의 역할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사유 속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진..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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